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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튀르키예(터키)

튀르키예여행 / 앙카라(한국공원)-투즈괼 (소금호수)-카파도키아(데린구유)

2.10

 

튀르키예로 국가명이 바뀐지는 얼마 안됐다

그러나 대부분 나라는 터키로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터키라고 쓴다고

문제되지는 않는데 유독 한국만큼은 거의 튀르키예라고 쓰고 있다고한다.

 

튀르키예와 한국은 "형제의 나라"라고 흔히들 얘기한다.

이번에 역사를 찾아보니 6.25참전에 대한 희생으로 인한 부분도 있고

고구려와 돌궐(투르크)는우호적으로 지냈다고 한다.

고구려가 융성할때는  돌궐족 백성을 고구려가 받아들였고 고구려가 망할때는

돌궐족이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후 투르크가 중앙아시아로 이동하고 이후 강력한 오스만제국을 세운다.

 

튀르키예 역사에서도 형제의 나라라고 배운다고 하는데

6.25때는 참전이 늦어지자 튀르키예 고등학생들이 형제의 나라인데

왜 도와 주지 않냐고 시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4강전 떄 붉은악마가 튀르키예국기를 흔들고

대형 튀르키예 국기를 올리자 이를 TV로 보던 튀르키예 국민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날 튀르키예에서는 한국인은 식당이든 호텔이든 무료였다고 한다.

이후 더욱 가깝게 되고 무역도 많이 증가했다고 한다.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신문기사 이런내용이 있었다"기자가 튀르키에 남부를 방문했었는데 거기서 다리 하나를 잃은 참전용사를 만났다고 한다.늙은 참전용사는 한국기자를 만나자 기자를 붙들고 너무 고맙다라는 말을 해 의아해 했는데 자기는 한국전에 참전을 해서 다리를 잃었는데 한국이 여전히 못살고 있으면내가 저런 나라를 위해 몸바쳤나 라고 후회 할뻔 했는데 한국이 많은 발전을 해   참전해서 작은 기여를 했구나라고 보람을 느끼게해줘 고맙다"라고 말해   참전용사도  기자도 같이 울었다고 한다.

 

가슴 뭉클해지는 내용인데 그래서 더욱 이번 지진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이른시간 아침인데 우리부부는 열심히 먹어댄다

고기는 없고 간혹 닭고기는 나오는데 소고기조차 안나온다

콩으로 만든 스프는 기본이고 치즈는 종류만 10가지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종류별로 다 먹어도 맛차이는 모르겠고 부드러움과 단단함 차이만 ㅋㅋ느껴진다

앙카라 시내에 있는 한국공원 

서울시가 71년 앙카라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후 , 6.25전쟁때 참전하여 사망한 군인들을 추모하기위해 세운 공원으로

불국사의 석가탑을 상징하는 위령탑으로 참전용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지금은 우기로 물에 비치는 모습을 볼 수있을텐데 날이 흐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인 

여름에는  건기로 소금사막이 광활하게 펼쳐진다고 한다.

전세계에서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 다음으로 크다고 한다

휴게소 화장실은 유료로 5리라를 받는다 

어떤부부가 같이 사용할려고 1달러를 줬더니 잔돈을 안주더란다

1달러는 대략 18리라 정도인데 

 

여기 황량한 소금호수에도

어김없이 개님이 등장한다

야생 그대로인데 순한게 이상할 정도이다

하얀건 소금이 아니라 눈이다

우기라 바닥도 질척거린다

흰버스로 모든일정을 돌아다니는데 약3500KM정도 이동 한다고 한다

에어프레미어 전세기에 내린팀이 9개팀으로 버스가 9대가 같이 다니고 

다른여행사에서 온 한국인들이 탄 버스등 가는곳마다 한국인들이 많았다

고속도로는 거의 직선으로 넓고 차량도 많지 않다

날이 점점 개면서 아나톨리아 평원의 멋진 풍경들이 펼쳐진다

평원에는 하얀 눈으로 덮여있고 간간이 보이는 나무는 상고대가 피었다

날은 개는데 이상해서 고도계를 보니 해발 1200정도가 나온다

고지대이고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곳이라 건조해서  해가 떠도 상고대가 남아있었다

중앙 아나톨리아의 카파도키아에 있는 평원 아래에 이 지역의 특징인 부드러운 화산암 속에 파서 세운,   이 도시에는 2만 명에서 3만 명의 사람들이 살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터널과 동굴들은 4천 년이나 그 전에 처음으로 파였던 듯하며, 기원전 700년에는 그 안에 많은 이들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 지역의 기름진 화산성 토양에서 경작을 하기 위해 왔던 정착민들은 혹독한 날씨를 피해 기꺼이 지하로 들어가 보호를 받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쳐들어오는 적들로 인해, 노출된 위쪽 땅이 여러 차례 히타이트와 트라키아인,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싸움터가 되면서 지하에서의 생활은 점점 더 영구적인 방편이 되어 갔을 것이다.

'깊은 우물'이라는 의미를 지닌 데린쿠유는 8층까지 내려가며, 아마 더 깊은 층들이 있을 것이다(아직 완전히 발굴해 낸 것이 아니다). 방대하게 얽힌 이 통로들은 지하를 파서 만든, 어떤 것은 독방 같고 어떤 것은 동굴처럼 깊은 수천 개의 '방들'을 연결해 준다. 이러한 방들은 기초적인 생활 설비만을 제공했던 것이 아니라 교회, 학교, 공동 부엌, 회의 장소, 심지어 마구간과 포도주 제조 구역까지 갖추고 있어 진정한 의미의 자급자족 공동체가 되었다.

복잡한 환기 갱도 시스템이 있어 공기를 호흡하기에 알맞은 상태로 유지해 주었다. 도시 안에는 비밀 터널, 탈출로, 중앙의 구멍에 막대기를 밀어 넣으면 터널 입구 앞에서 굴릴 수 있게 된 크고 둥근 '문들' 등 다양한 방어 시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 문이 제자리에 닫혀 있으면 그때는 구멍을 화살 쏘는 틈새로 이용할 수 있었다.

데린쿠유와 카파도키아의 다른 지하 도시–지금까지 40개 이상이 발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데린쿠유 [Derinkuyu]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 1. 20., 리처드 카벤디쉬, 코이치로 마츠무라, 김희진)

 

데린구유 구조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데린구유 매표소 

이곳을 지나 앞에 문처럼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면

지하로 가는 통로이다

여행프로그램이나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보던것을 실제로 보니 감개무량하다

안사람도 실제로 보고 단순히 지하동굴로 생각했는데 규모나

구조를 보고 굉장히 놀랐다고 한다

내부는 선선했고 두멍들 틈사이로 바람이 부는게 느껴졌다

구조는 워낙 복잡해서 가이드 말대로 길을 잃으면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렇게 넓은 광장 같은곳도 있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위해 이런 둥근돌이 있어 유사시 돌려서 막았다고 한다

내부는 좀다가 넓어지고 오르내리고 층고도 낮다보니

허리 아픈사람은 허리병 도질듯

층고 낮은데서 머리를 몇번 부딪혔다

 

데린구유 시내풍경